한 달은 괜찮아

되도록 회사 이야기는 안 쓸려고 하지만, 워낙 삶에 끼치는 임팩트가 크다보니 ㅠ.ㅠ 적당히 필터링 해서 적어보자. 며칠 전부터 사내에서 “윗선에서 개발자들 너무 논다고 야근하라고 했다더라” 라는 카더라 통신이 떠돌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우리 회사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제 팀장님께서 팀원들을 모아 놓고 취지해 대해서 말씀 해 주셨고, CTO님께서 기술본부 전체에게 이에 관한 메일을 보내셨다. 요지는 “4월 말까지 그 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우선 순위에 밀려나 있던 업무들을 집중해서 끝내고, 업무 집중도를 높여보자!” 이다. 그런데 이런 취지가 여러 단계를 거쳐 내려오면서, “한 달 동안, 평일 야근 + 주말 근무를 꼭 해야함” 이라고 직원들에게 전달되었다.

어떤 개발 센터는 주5회 야근, 월 2회 토요일 출근이 자체적으로 정해졌다고 하며, 어떤 곳은 그냥 주 6일 근무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팀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정해졌다)

회사에 처음 와서 놀랬던 점이 공식적으로 야근 수당과 주말 근무 수당이 없다는 것이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를 하면, 교통비라는 명목으로 연봉과는 상관없이 2~3만원 정도의 정액금을 준다. 언젠가 게시판에서 누군가 “일정 상 야근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저녁 식사비라도 지원을 해 주던가, 야근 수당을 현실화 해주세요 ㅠ.ㅠ” 라고 글을 올리자, 다른 누군가가 “회사에서 저녁 식사 제공해주고, 야근비 빵빵하게 주면, 시간 외 근무를 권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저녁 식비 지원과 야근 수당은 지원할 수 없습니다. 최대한 업무 시간 내에 일을 끝내고, 일찍 퇴근하세요!” 라고 단 답변을 순진하게 믿었더랬다. 그런 회사가 야근을 강요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야근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 야근 밖에 없고, 한 달이라는 시기가 못 박혀 있다면, 한 번 쯤 불태워 줄 용의는 있다. 난 아직 회사를 좋아하고, 하는 일이 재미있고, 우리 회사 경영진이 합리적이라고 믿으니깐.

하지만, 한 달이 지났음에도, “거봐- 하니깐 되잖아” 라는 마인드로 말도 안되는 일정을 잡거나, 계속 야근/주말근무를 강요한다면, 글쎄.. 그때도 과연 내가 하는 일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야근도 가끔 해야 생산성이 높아지지, 일상화 된다면, 누가 굳이 일과 시간 중에 집중해서 열심히 일할까? 열심히 하나 안 하나 어차피 늦게 가야하는데.

평일에 야근하고, 주말에도 회사에 붙어 있으면 과연 창의적인 생각을 할 시간이 있을까? 좀 더 많은 기술문서를 읽기 위해 영어 공부를 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새로운 개발 방법론, 새로운 언어를 습득할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개인 역량을 높일 수 있을까?

야근을 감안한 무리한 일정을 잡았을 때, 과연 충분히 좋은 품질의 코드를 생성할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 계속 시간에 쫓기다보면, 제일 먼저 희생할 부분이 품질일 거 같은데. 품질이 희생되면, 나중에 다시 발목을 잡아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건 상식 아닌가.

다행히 회사 게시판에 사우들의 이러한 우려들이 충분히 전달되었고, 경영진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고 본다. 이왕 시작한다고 했으니, 다시 되돌리지는 못할테고, 제발 부탁인데 한 달로 끝내 줬으면 좋겠다. 그 이상 이런 분위기가 계속 된다면, 일단 나부터 다른 고민을 해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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